순라길-종묘 나들이(Feat. 조선과 성리학)
미세먼지농도는 높지만 하늘이 너무 쾌청해서
종로 나들이를 떠났다.
원래의 계획은 북촌-서순라길 정도였는데,
162 버스안에서
동순라길부터 가보기로 (즉흥적으로) 정했다.
종묘는 조선의 왕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이 종묘를 좌우로 순라길,
즉 과거에 경비병들이 순찰을 돌던 길이 있는데
특히 서순라길은 나즈막한 돌담길에 아기자기한
공방, 카페, 레스토랑들이 막 생기기 시작하는,
익선동 상권의 바톤을 이어받을
우리 부부가 주목하는 차세대 골목상권이 되시겠다.
동순라길은 상대적으로 높은 담벼락과
인근의 빌라, 오피스 건물들로 인해
서순라길만큼의 정취가 없다고 익히 들었으나,
오늘은 내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기로 하고 발길을 향했다.
동순라길 초입에 위치한
가게인지 주택인지 모를 건물의 정문.
가게인지 주택인지 모를 건물의 정문.
오래되어 휘어진 나무 문틀과 파스텔톤 패턴의 커튼이
인조 잔디, 드라코 화분과 묘하게 어우러져
왠지모를 힙한 분위기를 내고 있엇다.
높은 종묘담벼락과 오피스 건물들.
그걸 한번 찍어보겠다는 어떤 아저씨.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세도 없이
어느새 종묘 정문에 도착했다.
어느새 종묘 정문에 도착했다.
마침 무료 가이드투어가 시작해서 얼른 입장권을 끊었다.
Kia, 나무들 봐라.
역시 서울 도심 내 최고의 녹지공간은
왕이 살던곳 아님 왕무덤이다.
처마가 왼쪽만 살짝 휘어져있다. 비대칭.
봉황이 그려진 막세기와를 보니
여기가 왕실의 건물은 맞나보다.
여기가 왕실의 건물은 맞나보다.
거대한 녹지와 연못.
일본이든 한국이든
왕가의 목조건물이 있는 곳엔 늘 연못이나 개천이 있다.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의 특성상 방화수가 필요했고,
왕과 백성의 구역을 구분하는 용도로도 활용했다고 한다.
Main 제사당인 '정전' 입구.
와아
와아2
우와아..
정면에서 정전을 보면 그 길이 때문에 입이 쩍 뻘어진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한번에 담을수 없을 지경)
최근 일본과 한국의 고대-근대 건축물을 유심히 보고있는데,
종묘의 지붕은 그야말로 클라스가 다르다.
원래 9칸이었는데,
왕이 죽을때마다 몇칸씩 확장했다고 한다.
왕이 죽을때마다 몇칸씩 확장했다고 한다.
지금은 19명의 왕과 30명의 왕후의 신전이 모셔져있다.
정전을 측면에서 찍은 사진.
안쪽에 오래된 기둥은 배흘림,
나중에는 민흘림이라고 한다.
(내눈엔 똑같음)
건물의 끝이 안보인다. 어마어마함.
조선건국의 실세 정도전은 고려시대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적극 도입/숭상하였는데,
유교라는 것이 얼마나 캐캐묵은 형식과
죽은 귀신 대접하는데 집착했는지,
왕이 종묘에서 제사의 예를 지킨답시고 물도 못먹고
화장실도 못가서 더러 옷에 실례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의 건국은
서양에서 르네상스 문화가 발전했던 시기와 겹치는데,
서양에서 르네상스 문화가 발전했던 시기와 겹치는데,
(조선건국: 1392~, 르네상스: 1300~1600)
해외에서는
"더이상 신(god)만 중요하지 않다. 나와 가족 이웃들
인간의 삶과 본질이 더 중요하다" 라며,
감히 절대존엄인 신과 인간이 검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천장화까지 나올시기에
우리는 왕이 예의차린다고 옷에 오줌이나 지리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결국 당시 통치세력은 죽은 선왕을 신격화시키면서
본인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도덕 강화버전인 유교분파인 성리학의 이념을
확대한 것이다.
확대한 것이다.
수많은 외세침략과 마침내 일본의 피지배국이 된것도 ,
결국 이성계와 정도전의 성리학 도입이 나비효과가 되어
국력과 인민이 더욱 합리적인 단계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선의 의료수준이
죽은자의 얼굴에 수탁의 벼를 베어 낸 피를 발라서
다음날 새벽에 살아나길 기도했을 정도로
미개한 수준에 머무른 책임에도 자유로울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죽은 왕과 왕비들에게 예의차리느라
거대하게 조성해놓은 사당을 쉽게 허물수가 없어서
후세에 좋은 녹지공간이 되고있는 정도랄까.
결론.
역시 서울 도심 내 녹지는 왕무덤이 최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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