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7] 따뜻한 3월, 창덕궁 데이트(Feat. 덕혜옹주)


 2019년 3월 17일(일), 간만에 미먼없는 푸른 하늘이다.
따뜻한 봄이 성큼 다가온듯 기분좋은 날씨,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에 놀러갔다





운이 좋게도 입장하자마자 하루 5번 있는
무료 한국어 가이드 서비스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자원봉사하시는 분들을 위해 박수!)




왕이 큰 행사나 중요한 집무를 보던 인정전부터 시작한다.
정면으로는 조정 대신이 정1품부터 9품까지
사열한 것으로 추측되는 표식이 서있다.

실내로 들어가보자!






밖에서 보면 복층구조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안에 들어가보면 이렇게 높은 천장으로 되어있다.

전등, 비단커튼, 유리창호와 같은 근대 서양문물이
전통양식과 어우러져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다른 왕의 집무실 대조전.
천장의 구조와 무늬가 매우 화려하다.




청기와가 아름다운 선정전.
일반 먹기와와 다르게 표면에 유약을 칠해서 굽는 과정을
거치는데, 비용이 매우 비쌌다고 한다.

다음 코스는

조선 최고의 미남왕이었다는 24대 왕 헌조의 서재,
'낙선재(1847)'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간택된 '효정왕후 홍씨' 대신,
3후보 중 1명이었던 김씨여인을 마음에 두었다는 헌종.

이후 후사가 없자 김씨여인을 후궁으로 들이고
선정전 내  '석복헌'을 지어
근처에 머무르게 했다는 러브스토리.




개구리인지 오리인지 모를 차양. 특이하다.







지난 안국동 한옥매물 구조변경을 고민하면서,
와이프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내가 이해못했던 아이디어를
실제 모습으로 발견!

신나서 달려감 후후





와이프는 부족한 공간을 저렇게 확장해서,
정면은 통유리로 모던하게 꾸미고 싶단다.

아 이제 이해.

기와선까지 확장하고 차양을 더 빼면될것 같다.




사실 낙선재는 헌종의 러브스토리 외에도
조선 마지막 왕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생전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곳이다.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자마자
오빠(순종)에 의해 강제 일본유학을 갔으며

이후 대마도 영주 아들과 정략결혼을 하기도했다.




중년 이후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 마사오가
자살유서를 남기고 행방불명 되었으며,

이후 몽유병과 정신분열증이 심해져서
수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이승만시절 계속 귀국을 거절당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
신정부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도
호의호식한 이씨왕실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왕실의 후손을 보듬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지위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어릴적 유모 변복동씨의 보살핌 속에
남은 여색을 여기 낙선재에서 마감했다고.

(**영화에서는 일본의 입김에서 벗어나고자
중국 망명을 기도하거나 독립투사들을
암암리에 지원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느 실제와 매우 다르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기모노를 즐겨입고
일본어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어려운 국가상황에 대해 평생 단한차례의
주체적 혹은 독립적 언행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맨정신일때만 겨우 이정도 낙서가 가능할 정도로
덕혜옹주의 (정신)건강은 좋지 않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낙선재의 누마루.





맨 앞에는 마루방, 뒤로 온돌방이 있는데,
가운데 문이 서촌 누와에서 봤던
원형의 창호형태이다.

중국 건물양식에서 주로 볼수 있다고 하는데
낙선재가 중국의 영향을 받은건지
아니면 조선 고유의 양식인지 알수 없다.

어찌됫건 내눈엔 아름답다.







나무 난간이 매우 소박하면서 디테일이 살아있다.






누마루 뒤쪽면에서 감상.

다시봐도 예쁘다.

세계문화유산 주제에 관람료(성인기준)가 매우 저렴하다

창덕궁 3천원
창경궁 1천원
후원 5천원.

이거시 바로 진정한 만원의 행복.

창경궁과 후원 관람은 날씨가 더 따뜻해지는
4월로 미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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